이별이라는 단어의 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야마토에게 있어 헤어짐이란 슬픔이나 아쉬움을 넘어서 거의 공포에 가까웠다. 이제까지 겪었던 이별은 본인의 의사 따위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졌고 또 갑작스러웠으며 늘 피가 낭자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약조차 할 수도 없도록 주위 사람들은 야마토와 아주 헤어져버리고 말았다. 야마토는 품 안에 고이 넣어놓았던 옥패를 꺼내들었다. 마지막까지 야마토와 함께 있어 주었던 여인이 내어 주었던 물건이었다. 옥패는 이시다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을 나타내고 있었다. 야마토는 자신의 아버지가 옥패를 늘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옷자락 사이로 보이던 옥패가 멋들어졌던 것도 쉽게 떠올랐다. 보물이라도 만지듯 야마토는 옥패를 손으로 살살 쓰다듬었다. 강가에 앉아있던 그는 반대편에서 산새가 우는 것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네 아비는 잘못이 없다. 우리만은 그걸 믿어야해.」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야마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미가 했던 말 때문만이 아니라 야마토는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를 굳게 믿고 있었다. 티끌 하나 묻어나올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린 야마토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역이라. 그럴 리가 없었다.
「이시다, 저 자가 왕족을 시해하였다.」
어미의 목에 칼을 꽂아 넣고 야마토와 그의 동생을 묶어 물속으로 던져버렸던 사내의 모습은 소년의 눈에 비칠 것처럼 또렷했다. 그 표독스럽던 자로 인해 가족들과의 마지막은 처참하게 끝이 났다.
야마토에게 있어 이별은 아주 강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쥐고 있던 옥패를 다시 품안으로 감추었다. 어쩐지 속이 쓰렸다.
그 날 이후로 야마토는 타이치를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꼭꼭 숨어있는 것 같았다. 야마토는 너는 그러지 않을 거지. 라고 물으며 울던 타이치에게서 수많은 불안감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왜 찾아와주지 않아? 라고 투정부릴 수도 없었다. 걱정이 되면서도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마음을 어찌 할 수 없던 야마토는 시무룩하게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져갔다. 외로움을 견디는 것에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혼잣말도 해보고 천천히 강 주변을 서성여도 보고 꽃밭을 다녀오기도 했다. 야마토도 나름의 노력은 많이 해보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강을 쫒는 자신의 눈이 야속했다. 조금 더 안정이 되면 타이치도 다시 찾아와 줄거라 생각하며 야마토는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 것만 같았다. 재잘거리는 목소리, 스쳐 닿기만 해도 두근거리던 손, 지치지도 않는지 야마토를 이리저리 이끌던 몸짓 모든 것들이 벌써 그리웠다. 그를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야마토는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냈다. 혼자 남겨졌을 때 만난 인연이라는 것이 유독 마음을 내어주게 되는 까닭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야마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푹 빠져버린 게 아닐까. 강에 빠진 것처럼.’
본인이 한 생각에 얼굴이 확 하고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야마토는 고개를 숙였다. 화끈거리는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고 자리에서 확 일어난 야마토는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뭐라도 먹을 것을 구하자 하며 향했지만 사실 괜히 부끄러워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것이었다. 야마토는 나무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흙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낯익은 소녀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타이치만큼이나 요즘 들어 통 보이질 않던 수피아들은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다. 그래도 나름 친해진 덕에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숲의 안쪽까지 들어선 야마토는 계속해서 나무 위쪽을 유심히 살피며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침한 소녀들의 모습은 전혀 없었고 산새들만 조롱조롱 거렸다. 한숨을 쉬며 한 손에 가득 따놓은 열매 하나를 입 안에 넣었다.
“이미 눈치 채고 도망쳐버린 거 아냐?”
“목소리 좀 줄여. 여기 있다 해도 너 때문에 도망할 거다.”
열매를 깨물어보기도 전에 웬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마토는 저도 모르게 황급히 나무 뒤로 숨어야했다. 사내들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연신 툴툴거려대고 있었다. 대화를 자세히 들어보니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수피아고 뭐고 여긴 없다니까. 이미 다 떠난 거야.”
사내들은 하나같이 어깨에 이상한 물건을 하나씩 이고 있었는데 아마도 수피아들을 잡아 가둘 그물인 것 같았다. 야마토는 잔뜩 긴장한 몸을 어떻게든 풀어주려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는 어기적거리며 기어서 조금 더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작은 아이의 몸은 수풀이 충분히 가려줄 정도였다. 덕분에 야마토는 조금이라도 더 떨어진 곳에 몸을 감출 수 있었다.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던 야마토는 쥐고 있던 열매가 다 터져 손이 빨갛게 물든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비록 자신이 수피아인 것은 아니었지만 숲 속을 혼자 해매고 있는 지저분한 남자아이를 뭐라고 생각할지도 몰랐고 어쩌다 정체가 들통나버리기라도 한다면 아주 골칫거리였다. 야마토는 사내들이 어서 이 길을 지나쳐 가버리길 바랐다. 지나간다 해도 시간이 오래 지나고 나서야 움직일 수 있겠지만 일단은 숨통이라도 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야마토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내 한 명이 조금전 까지도 야마토가 열매를 따던 곳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잠깐만, 거기 서 봐.”
“뭐야? 어차피 없어, 없다니까? 그냥 돌아가서 술이나 들이키자고.”
“여기 이거 발자국 아냐? 아이 거 같은데.”
야마토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놀란 나머지 소리를 낼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아 저지했다. 시큰한 냄새가 훅 끼쳤다. 그제야 빨갛게 물이 든 자신의 손을 눈치 챘다. 사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주변을 샅샅이 뒤지라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목 끝까지 올라온 비명을 도로 집어넣으며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야마토는 자신의 입을 콱 틀어막아버리는 누군가의 손길에 몸부림을 쳤다.
“소리 내면 안 돼!”
정신없이 팔다리를 휘젓던 야마토는 앳된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자신의 앞에 다가와 쪼그려 앉아있는 것은 미미였다. 검지를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던 미미는 얌전해진 야마토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뒤에서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것은 전혀 모르는 남자였는데 미미가 경계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수피아들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미미는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야마토는 금방 피어오르는 안도감에 숨을 삼키고 미미의 손길을 따라 달렸다. 그는 빠르게 뛰면서 아주 신기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은 옷깃만 스쳐도 사라락 소리를 내던 수풀들이 수피아들에게는 부딪혀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흙은 그들의 발자국을 감춰주려는 듯 단단하게 뭉쳐져 있었고 나무들은 잎을 더욱 드리워 수피아들을 감춰주었다. 미미 덕분인지 야마토 역시 숲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요즘 숲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어.”
눈 깜짝할 새 아찔한 높이의 나무 위로 올라간 이들은 나뭇잎 사이로 숨었다. 미미는 불안한 표정을 대놓고 드러내며 아래를 살폈다. 사내들이 멀리서부터 두리번거리며 수피아들을 찾고 있었다. 야마토는 미미가 혼자 있는 것이 의아해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항상 같이 다니던 또 다른 소녀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미미가 미리 알았는지 야마토에게 말했다.
“소라언니는 다른 쪽에 숨어있어.”
“아아, 그렇구나.”
“저기 있잖아. 사실 전에 찾아갔을 때 말해주려고 했는데. 우리 곧 이 곳을 떠나. 숲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미미의 말에 야마토는 이 때 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언제 다시 돌아오는데?”
“한 번 떠난 숲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아.”
“아예 떠나는 거야?”
“응, 그리고 수피아가 떠나버린 곳은 아리아도 곧 뒤따라 떠나.”
좀 전까지도 그러려니 하며 대답하던 야마토는 미미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목소리가 막혀 입만 뻐끔거려야 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미는 확인사살이라도 시켜주듯 한 번 더 말해주었다. 타이치 오빠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그리 말하는 미미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야마토는 표정을 서서히 일그러뜨렸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사냥꾼들은 숲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있는 중이었다. 번뜩이는 그들의 눈빛은 마치 맹수 같았다. 저런 이들에게 타이치가, 또 제 앞에 앉아있는 미미가 잡혀가는 것은 바라지 않았지만 야마토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에 힘겨워 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밀려들어오는 파도같이 무언가가 야마토의 가슴을 막고 있었다. 그는 숲을 뒤지고 있는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사냥꾼들이 너무도 미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수피아들이 떠나면 아리아들도 함께 떠나야 하는 거야?”
“우리 수피아들이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숲이 더 이상 우리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의미해. 그건 곧 아리아들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야. 우린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서 살아가니까.”
미미 대신 야마토의 입을 막았던 수피아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야마토는 점점 굳어버리는 것만 같은 가슴을 쥐어뜯고서 다시 물었다.
“왜 더 이상 숲이 너희들을 못 지켜주는데?”
“보다싶이 우릴 잡고 싶어 안달이 난 인간 놈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는 말이거든.”
“…….”
“저놈들은 간악해서 숲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보호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우리의 존재를 저들이 이미 눈치 챘다면 숨어 봤자 소용없지.”
미미는 슬픈 눈을 하고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야마토의 반응이 생각보다 심각해서였는지 미미는 연신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럼 언제 떠나는데?”
“오늘.”
“…….”
“오늘 바로 떠날 거야. 우리가 발걸음을 떼는 순간 아리아들도 이곳을 뜰 걸.”
야마토는 주먹을 쥐었다. 굳어버린 열매의 과즙 때문에 한쪽 손이 끈적였다. 타이치가 한동안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 것은 이런 이유였을까.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버리려고, 말 한마디 해주지 않은 채 가버리려고. 그래서 그랬을까.
“이미 몇몇의 가족들이 끌려갔어. 더 잡히기 전에 얼른 이 곳을 떠야 돼. 끌려간 가족들처럼 어딘가에 박제되어 있거나 사람들의 유흥거리로 소모되어 죽어버리기는 싫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잔인한 말을 내뱉는 수피아 때문에 야마토의 머리가 더욱 끓었다. 참지 못 하고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수피아를 밀치며 그의 옷깃을 꽉 쥐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리 담담하게 하느냐고 묻자 미미가 야마토를 말리며 말했다.
“우리도 슬퍼. 슬프고 무서워. 하지만 이런 끔찍함이 우리에겐 일상이야.”
“…….”
“막 내뱉는 거 아냐. 담담하게 말하는 것도 아냐.”
포기한 거지. 그 말을 끝으로 미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야마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이 순간도 타이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강가로 가야했다. 가려면 작별인사라도 하고 가. 제발 그대로 떠나지 마. 입 안에 머금은 말들을 내뱉지는 못 한 채 자신이 지내고 있던 동굴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타이치를 봐야했다.
강물이 요동쳤다. 아리아들은 물결이 실려다준 소식으로 아직 수피아들이 떠나지 못 했다는 것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성체인 아리아들을 앞으로 세우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강은 이미 그들을 인도할 길을 내고 있는 중이었다. 물의 흐름을 따라 헤엄치다 보면 나올 새로운 거주지를 바라며 그들은 떨리는 손을 주물렀다. 그 곳에서도 역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사냥꾼들을 경계하며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게 될 운명을 애석하게 여기며 기도했다. 일단은 지금 당장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죠는 타이치와 히카리의 손을 잡았다. 특히 타이치의 손을 빠져나갈 수도 없게 꽉 붙잡고 있었다. 타이치는 낯빛이 잔뜩 어두워진 상태였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것을 본 죠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타이치에게 말했다.
“네 맘은 알아. 알지만 네 고집을 받아줄 수는 없어. 이 판국에 어떻게 인간 아이를 데려가. 안 그래도 다들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나 있는걸.”
“알겠어, 더 이상 데려가겠다는 말은 안할게. 하지만 인사는 해야겠어.”
“곧 떠나야 돼. 수피아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인사만……. 형, 인사만 할게. 제발……. 그 동안 떠날 준비 한답시고 만나지도 못 하게 했잖아.”
타이치의 간절한 부탁에도 죠는 완강했다. 죠가 손에 힘을 빼주지 않자 타이치는 눈을 꽉 감았다. 정말 이대로 떠나버려야 하는 걸까. 야마토는 분명 언제 타이치가 와주려나 하고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고독에 지쳐 애달프게 웃던 아이를 말도 없이 놓고 가는 것은 너무도 잔혹한 일이었다. 타이치가 어찌 해야 하는지를 한참동안 고민하고 있을 때 우두머리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물살이 그들의 몸을 불안하게 감싸고 있었다.
“숲에 인간들이 있어.”
수피아들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멈추었던 것을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가 그 이유를 알아버리자 아리아들은 금세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떠나는 게 어떠냐는 소리와 그래도 그들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소리가 부딪혀 혼란이 점점 커져갔다. 죠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아리아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긴장한 나머지 아이들을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그걸 놓칠 리 없던 타이치는 재빠르게 잡힌 손을 빼내고 등을 돌렸다. 죠와 히카리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야마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인사만, 인사만 하고 갈 거야. 그리 혼잣말을 하고서 빠르게 움직였다.
한편 야마토 역시 미미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미미는 다짜고짜 나무 아래로 내려가려는 야마토를 힘겹게 막고 있었다.
“너희들에 관한 건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말 안 할 거야. 그러니까 내려가게 해줘.”
“안 돼, 대체 어쩌려는 거야?”
“타이치를 봐야 돼.”
“우리들의 움직임이 늦어지고 있는 걸 벌써 알고 아리아들은 먼저 출발 했을 거야! 강이 이미 전해줬을 거란 말이야!”
“그냥 갔을 리 없어!”
같이 있던 수피아는 보다 못 한 나머지 야마토의 팔을 부여잡았다. 야마토가 아래로 내려가서 들켜버리면 어찌 되었든 자신들도 역시 발각될 거라고 말하자 야마토의 몸부림이 작게나마 멎었다. 하지만 눈빛은 그게 아니었다. 야마토는 애원하듯 미미를 바라보았다. 미미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야마토가 입술을 꽉 씹으며 몸을 비클려 할 때였다. 그들이 밟고 서 있던 나뭇가지 위로 다른 소녀의 발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주홍빛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어둡게 내려앉은 소라의 얼굴을 확인한 야마토는 그녀에게 한 쪽 손을 뻗었다.
“도와줘, 내려가게 해줘.”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지금 가도 어차피 늦었어. 아리아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단 말이야.”
“혹시 모르잖아. 모르는 거잖아!”
기어코 차오르는 눈물을 막지 못 하고 야마토가 서러운 듯 외쳤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크게 내지 못 하는 목소리 때문인지 모습이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소라는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야마토의 눈빛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날 데려가줄 것도 아니잖아. 너희는 사람이라면 다 싫어하니까. 나도 생각이란 게 있으니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 그런 너희가 날 이렇게 잡고 있을 자격은 없지 않아?”
“…….”
“날 보내줘. 잘 가라고 인사라도 한 다음 보낼 수 있게.”
무시할 수도 없게 야마토는 꽉 메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소라는 자신의 팔을 꽉 붙잡고 있는 미미를 살짝 떼어놓고 야마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야마토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야마토의 손을 잡았다. 야마토를 붙들고 있던 수피아는 소라가 하는 행동을 보고서는 알겠다는 듯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네가 이 빚을 갚을 수 있을 날이 오길 바라.”
그 말을 끝으로 소라는 야마토를 이끌었다. 영문도 모른 채 소라가 끌어당기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던 야마토는 나무들이 나뭇가지를 가까이 붙여 길을 터주는 것을 보고 눈물을 멈추었다. 사냥꾼들은 숲이 얼마나 수피아들을 지켜주려 애쓰는 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의 모습을 숨겨주는 지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바람도 일지 않는데 단단한 나뭇가지들이 움직이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 챈 그들은 소라와 야마토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들이 눈치 챘다는 사실을 소라 역시도 알아차리고 있었다. 중간까지 야마토와 함께 이동해 준 그녀는 곧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야마토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나무들이 계속 도와줄 거야. 쫓아서 천천히 걸어.”
“…….”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우리도 이젠 정말 떠나야 돼.”
“응, 고마워. 잘 가.”
야마토는 진심을 담아 인사했고 소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돌아섰다. 수피아들은 곧 떠나야만 했다. 사람들이 아예 따라붙기 전에. 그들이 무사히 빠져나가길 바라며 야마토는 계속 나무가 내주는 길을 따라 조심조심 걸었다. 그리고 마지막 나무에 다다라서는 편하게 발을 딛을 수 있도록 나 있는 가지를 밟고 내려갈 수 있었다. 야마토는 땅에 다다라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야마토가 급하게 강가로 달리고 있을 때, 타이치는 물 밖으로 어깨까지만 내민 채 야마토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강이 어서 떠나라며 타이치의 다리를 빙빙 휘감았다. 곧 갈 거야, 야마토한테 인사만 하면 갈 게. 그렇게 말하며 타이치는 계속 강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 자신만 기다리고 있을 야마토는 코빼기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동굴 안에도 인기척이 없는 것을 보아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하필 이런 때에 어딜 간 거야. 하고 애타는 마음을 드러낸 타이치는 멀리서 달려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그토록 찾고 있던 야마토가 보였다. 그는 뭔가 아주 급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눈이 마주쳤다. 야마토의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가 곧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무작정 물로 뛰어 들어오는 야마토에게 놀라 타이치도 덩달아 빠르게 다가갔다. 야마토가 타이치를 불렀다.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며 달려온 야마토를 보고 타이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타이치도 야마토의 이름을 불렀다. 똑같이 몇 번이나. 겨우 타이치의 곁에 닿은 야마토는 이제 곧 자신을 떠나야 할 소년을 꽉 안았다.
“타이치, 타이치 사람들이 왔어. 수피아들이 그래서 떠난대. 어, 근데 수피아들이 가면 너희도 가야한대. 네가 떠날 거랬어. 그냥 가버렸을 거라고…….”
두서없이 빠르게 쏟아내는 야마토의 말을 들은 타이치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야마토를 세게 마주안고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는 타이치에게 야마토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네가, 나는 작별 인사도 없이 네가 가버리는 줄 알았어. 그러면 안 되잖아. 어떻게 그래. 왜 인사도 없이 가, 왜.”
“응, 하러 왔잖아. 아직 안 갔잖아.”
야마토는 타이치를 놓아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과즙 때문에 끈적이던 손에 물이 묻어 미끌 거렸다. 그 손으로 타이치의 옷깃을 꽉 쥐고 있던 탓에 빨간 물이 들었다. 야마토는 타이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타이치가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를 끌어안은 팔을 풀 수가 없었다. 소라와 미미가 아리아들은 이미 떠났을 것이라고 말했던 그 때부터 야마토의 안에서는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이치의 얼굴을 본 순간 터져버리고 말았다. 벌써부터 야마토를 옥죄어 오는 고독감이었다. 심장이 멎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인사라도 들어야 한다고, 다음을 기약하며 널 보낼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뛰어왔는데. 근데…….”
“…….”
“네가 가버리면 죽어버릴지도 몰라, 벌써 숨이 안 쉬어져. 못 쉬겠어.”
타이치는 살짝 젖어있는 야마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널 떠나기 싫어, 너와 헤어지기 싫어.”
“…….”
“그래서 너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 아리아들의 경계가 너무 심해. 도저히 사람인 널 데려갈 수는 없대.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질 않아.”
“그랬겠지. 알고 있어. 그게 당연한 거라는 것도 알아.”
“미안해, 야마토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는 타이치의 사과를 듣고 야마토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리아들에게 있어서는 목숨이 달려있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미안하다 하는 타이치는 어떤 심정일까. 야마토는 다시 타이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어야했다. 야마토의 등을 토닥이던 타이치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강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주먹을 꽉 쥐고 있던 타이치가 손을 펴자 고사리 같은 손 위에 투명한 구슬 하나가 생겨있었다. 그리고 그 구슬을 야마토의 손에 꼭 쥐어주었다. 야마토는 어느새 촉촉해진 눈으로 타이치가 준 구슬을 빤히 쳐다보았다.
“넌 또 외로움을 고뿔처럼 앓겠지. 근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지 말라고 이걸 너에게 줄게.”
타이치가 웃었다. 조금 슬픈 미소였다.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 때 이걸 나한테 보여줘.”
“……징표 같은 거야?”
“아니, 그런 거 없어도 난 널 금방 알아 볼 거야. 약속할 수 있어. 그건 널 알아보기 위한 게 아냐. 날 잊지 말라고 주는 거지. 다시 만났을 때 나를 쭉 기억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이걸 보여 줘.”
“…….”
“우리 꼭 다시 만나. 야마토 널 다시 만날 거야.”
타이치의 입에 미소가 고였고 눈에는 맑은 물이 고였다. 그런 타이치를 보던 야마토는 제 품 안을 뒤적이더니 항상 지니고 다니던 옥패를 꺼내들었다. 타이치는 자신의 손에 옥패를 꼭 쥐어주는 야마토를 한참동안 바라보아야 했다. 너한테 아주 소중한 것이 아니냐고 물어보니 야마토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타이치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돌려주려 하자 야마토가 타이치의 두 손을 마주잡았다.
“우린 꼭 다시 만날 거니까 그 때 돌려줘. 약속을 지켜달라고 주는 뇌물이야.”
“뇌물이라니 농담하지 마. 야마토 난 이런 거 없어도…….”
“이걸 돌려받으러 내가 찾아갈게. 그러니까 너도 날 잊지 마. 제발 잊지 마.”
“……알았어.”
타이치의 눈동자가 올곧게 빛나고 있었다. 야마토는 자꾸만 이기적으로 변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며 타이치의 손을 서서히 놓아주었다. 떠나기를 주저하는 타이치에게 어서 가라고 말해주자 타이치는 잘 지내라는 말을 하며 야마토에게서 점점 멀리 떨어져갔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볼 용기가 없던 야마토는 차라리 보지 않으려 뒤로 돌아버렸다. 강물 위로 그의 눈물이 퐁당거리며 떨어졌다. 그 때였던가. 야마토의 몸이 획 하고 돌려졌다. 아직 떠나지 못 한 타이치가 보였고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보였다. 소년들의 입술이 맞닿았다. 어쩐 일인지 야마토는 놀랄 법 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평온했다. 타이치의 말랑한 뺨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조금 더 입술을 꽉 눌러보았다. 따뜻함이 온 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꽤 오랜 시간 닿아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타이치가 말했다.
“다시 만나면 알려줘. 네 입으로 직접 알려줘. 이게 무슨 뜻인지.”
야마토가 타이치와 이마를 맞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입맞춤을 하고 나서야 그를 정말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손에 쥔 투명한 구슬을 소중하게 쥔 채로 타이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야마토에게 있어 이별은 강제적이고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면서 재회를 약속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때문에 황폐해졌던 아이의 마음은 처음으로 희망이란 것을 품었다. 잃어버리지 않으려 꼭 쥔 구슬을 바라보던 야마토는 아까 숲 속에서 들었던 사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가 난 쪽을 차갑게 노려보던 아이는 곧 뒤돌아서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숲이 고요했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
오랜만에 아리아를 데려왔는데 마침 들고 올 편이 헤어지는 편이었어요...(죽어있다
'소설 > Ar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마타이]Aria 09 (9) | 2015.06.08 |
---|---|
[야마타이]Aria 07 (0) | 2014.09.08 |
[야마타이]Aria 06 (0) | 2014.09.08 |
[야마타이]Aria 05 (0) | 2014.09.08 |
[야마타이]Aria 04 (0) | 2014.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