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타이]Seirios 26
2주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새 흘렀다.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동안 타우로시즈나 세리오스는 언제나 그러했듯,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범죄들로 여전히 골머리를 앓던, 새로 관계를 맺은 조직들과 밀거래를 하던, 두 집단은 각자의 일을 착실히 이행해나갔다. 그 사이에서 시간이 멎어버린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미야코 한사람 정도였다.
“이러다 성질 버리겠어.”
“거기서 더 버릴 성질이 있다니.”
“넌 제발 좀 나가, 다이스케!!!”
이 정도면 놓아버릴 만도 한데 미야코는 용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포기를 할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다이스케는 그녀의 집념과 노력에 박수를 쳐주며 과자를 야금야금 뺏어먹는 중이었다. 미야코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음을 미안해하던 야마토, 미미, 죠, 세 사람이 잔뜩 사다놓은 간식이 다이스케의 배만 채워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러건 말건 미야코는 자신의 일에만 전념했다.
「오늘도 미야코는 어김없이 홀로 전쟁 중!」
그런 미야코의 현 상태를 미미가 누군가에게 착실히 보고하고 있었다. 뭔가 싶어 야마토와 죠가 옆에서 힐끔거려보았다. 미미의 전용 수신기 위로 떠 있는 이름은 히카리와 타케루였다. 죠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것 하나는 참 잘 한다니까. 그리 말하는 죠에게 미미가 무슨 말이냐며 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죠가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던 와중에 타케루에게서 먼저 답장이 날아왔다.
「대신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빠르게 오는 답장을 보며 미미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언제나 나이 대와 어울리지 않는 업무량에 치여 살던 두 막내들이었다. 그런데도 타케루와 히카리는 연락을 줄 때마다 착실히 답해주곤 했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상황이 조금 달라지긴 했다. 타케루는 여전했지만 히카리는 예외였다. 늦어도 30분 내지 한 시간 안으로 답을 주긴 했었지만 그마저도 힘들면 넘겨버리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히카리도 아직도 미미에게 골이 나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히카리는 요즘 답이 없네.”
“그래?”
“응 많이 바쁜가봐.”
일부러 연락을 피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미미는 그저 시무룩하게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타케루 말로는 일부러 일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댔어.”
품에 서류들을 한 아름씩 이고 다닌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아쉬운 마음만 품는 게 고작이었다. 히카리가 왜 스스로 업무량을 갑자기 늘렸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야마토와 죠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히카리를 말리는 게 좋은 것일지, 그냥 두는 것이 더 나은 것일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다른 곳에 정신을 팔리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는 것이었다. 과다한 업무를 떠안다가 몸이라도 상하면 큰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을 못하게 막는다면 히카리는 다른 의미로 무너질 지도 몰랐다. 미미는 타케루에게 히카리를 조금만 더 지켜봐달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답장을 받았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히카리를 힘나게 해주고 싶은데.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질 않아.”
풀이 죽은 미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야마토는 쓰디 쓴 입안을 혀로 쓸어보았다. 누구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지금 히카리에게 어떤 위로를 건넨다한들, 진정으로 그녀의 마음을 치유할 수는 없었다. 세 사람은 또 다른 곳에서 고군분투 중인 미야코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누구라도 어찌 할 도리가 없어.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야마토의 말에 미미와 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현재의 정답이었다.
히카리는 열차에 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호화로워 보이는 열차는 이 일대에서 이름난 갑부의 명의로 된 것이었다. 열차라고 하기에는 우스울 정도로 화려한 내부가 히카리의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히고 있었다. 히카리는 중간, 중간 덜컹이는 열차의 진동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서 피곤한 눈을 비볐다. 업무를 보기 위해 리브러즈와 멀리 떨어진 외지까지 나와 있던 상태였다. 현재는 모든 일들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여유로워진 틈을 타서 메시지가 가득 쌓인 수신기를 들여다보았다. 대부분 미미와 타케루의 메시지였으며 미야코의 상황과 자신에 대한 걱정이 주류였다. 히카리는 피식- 하고 웃어보였다. 현재 시간을 보고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까지 확인했다. 답장을 보내기에는 애매할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나있었다. 어쩔까 하던 히카리는 결국 수신기를 내려놓았다.
‘피곤해.’
타케루가 면박을 줄만큼, 히카리는 확실히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갑자기 워커홀릭이 된 이유가 뭐냐며 염려서린 말들을 재차 듣고 있었다. 심지어 이제 스스로도 피곤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히카리는 자신이 꽤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모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게, 혹여나 잡생각에라도 빠지지 않도록. 히카리는 스스로를 꽉 옥죄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리움에 잠식당할 것만 같아서였다. 잠꼬대로라도 ‘오빠.’라는 단어를 내뱉는다면 그 순간 핀트가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히카리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자신의 옆으로 수북이 쌓인 서류뭉치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가다간 미미 언니나 다른 오빠들도 걱정하시겠지. 타케루는 말 할 것도 없고.’
뻑뻑해진 눈을 감았다. 히카리는 온 몸의 힘을 빼고 좌석 등받이에 최대한 편안하게 기대었다. 도착할 때까지 만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선잠이라도 좋았다 피로에 찌든 몰골이라도 감춰야했기 때문이었다. 스트레스가 누적된 몸은 빠르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열차 안은 사람들이 별로 없어 조용했다. 바퀴가 선로 위를 미끄러져 가는 소리나 바람을 가르는 소리마저도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소연한 분위기에 취해 얕은 수면 공간을 지나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드려는 순간이었다. 히카리는 잠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진 것을 느끼며 눈을 떠야했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상황을 파악했다.
“다, 다들 얌전히 있어!! 움직이면 큰, 큰일 날 줄 알아!”
열차 안에 있던 사람 수가 눈에 띠게 늘어있었다. 히카리는 자신의 눈앞에서 어색하기 짝이 없는 협박을 해대는 사람들 무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척 보기에도 평범한 민간인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이런 고급 열차에 들이닥쳐 위협 아닌 위협을 하고 있었다. 이유가 뭔지는 아직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그 순간, 히카리는 자신이 탄 칸의 바로 앞쪽 칸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며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히카리는 열차에 탑승하기 전,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떠올렸다. 앞쪽 칸에는 이 열차의 소유주이자 이 일대에서는 유명한 갑부가 타고 있다고 들었다. 앞쪽 칸에서부터 들려오는 이름은 그 갑부의 이름이었다. 대강의 정황을 눈치 챈 히카리는 괴한들이 눈치 챌 수 없도록 옆에 내려놓았던 수신기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위치, 열차 안의 상황, 열차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침착하게 적어 타케루와 미미에게로 발송시켰다.
“허튼 짓 하면 다 같이 죽는 거야!!”
그 짧은 시간에 괴한들은 더욱 흥분해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감정에 치우쳐 정말 큰일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카리는 리브러즈와 타우로시즈에서 발 빠른 대처를 해주길 바라며 숨을 죽여야 했다.
“억울하면 네놈들 다 사사키를 탓해!! 이건 다 저 새끼 때문이니까!”
‘이 열차의 소유주.’
“저 새끼가 잘만 했으면 우리도 이런 짓까지는 안 해!”
‘사사키에게 고용된 사람들인가……. 사사키는 하청업체를 자기 입맛대로 부려먹기로 유명한 사람이니.’
무장이라고 해봐야 부러진 각목이나 다 녹슨 날붙이가 전부인 사람들을 보며 히카리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히카리는 미미와 타케루에게서 다급하게 온 답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히카리가 처한 상황을 인지했고, 당장 달려오겠다는 답을 주었다. 수신 메시지를 보자마자 히카리는 앞쪽 칸으로 어이지는 문을 직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괴한 한 명이 화들짝 놀라며 히카리에게 덜컥거리는 칼을 들이밀었다.
“당장 앉지 못 해?”
“지금 저 쪽에 사사키씨가 탑승하고 있죠? 지금 그를 협박 중이신가요?”
“……뭐, 너 뭐야!”
“보시다시피 저는 아무런 무기도 없는 맨 몸입니다. 여러분께 해를 가하지는 못 해요. 저는 그냥 앞 칸으로 넘어가고 싶을 뿐입니다만, 괜찮을까요?”
히카리는 최대한 흔들림 없이 정중하게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그녀의 단호한 반응에 다소 당황했던지 무기를 든 사람들이 주춤거리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그들은 사사키 한 명 만을 노리고 온 것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 생각은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히카리는 혹여나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 그들을 안심시켰다. 지금은 모두의 안전이 우선이어야 했다. 그녀는 아주 느린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칸막이 문까지 다가갔다. 이런 일에 대비를 해 왔을 사람들이 아니다보니 히카리를 막아서지 못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옆으로 밀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여린 앞 칸의 광경은 본인이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뒷칸의 풍경과 다를 게 없었다.
“너희들 뭐하는 거야!! 전부 얌전히 앉아있도록 시키랬잖아!”
“그, 그게 이 여자애가 멋대로……!”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로 사사키라 불리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새파랗게 질린 사내는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낡아빠진 칼날이 자신의 피부에 상처라도 낼까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히카리는 망설임 없이 남자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괴한들과 마주섰다.
“자, 그럼 이제. 대화란 걸 나눠봐야겠네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하던 기색은 싹 가셔있었다. 히카리는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바로 섰다. 작은 여자아이의 기세에 눌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열차를 습격한 사람들은 이를 빠득거리며 갈아댔다.
한 편, 같은 시각 타우로시즈는 미미에게서 히카리에 관한 소식을 전달받고 급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히카리가 있는 곳은 중부 쪽이었고 관할 서에 있던 대원들을 출동시켰다. 히카리와 관련한 일이니만큼 미미와 야마토 역시 움직이기로 했다. 죠는 꼭 히카리를 잘 데려오라는 말을 하고는 두 사람을 배웅해주었다.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나왔지만 두 사람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야마토와 미미는 이동하는 중에 상관에게서 좀 더 사제한 사항을 보고받을 수 있었다.
“열차를 습격한 용의자들은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고 평범한 민간인이야. 사사키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하청업체 직원들이지.”
“그 사람들이 어째서?”
“쭉 쌓여오던 불만이 터진 것 같다. 돈도 많다는 새끼가 임금을 제대로 지급해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근데 지금은 이게 문제가 아냐. 자칫하면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다칠지도 모르니까.”
미미가 답답하다는 듯이 거칠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꼼질거리기도 하고 괜히 입술을 쥐어뜯기도 하는 등, 온갖 부산스러운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많이 불안하다는 증거였다. 야마토는 그런 미미를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행동들을 저지시켰다. 히카리는 자신들처럼 사람들을 제압하고 싸우는 아이가 아니다 보니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 다치지만 않기를 바라야했다.
“히카리,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그 상황에서 직접 신고까지 했잖아.”
“아, 운전하는 사람 누구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느려! 좀 더 밟아봐!”
“진정 좀 해.”
야마토가 미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이미 불안감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미미를 보며 혀를 차던 상관은 현장에 있는 다른 대원과 열심히 교신 중이었다. 전해 듣자니 열차는 다음 역과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속도를 전혀 줄이고 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관실 쪽까지 점령했나 보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일단 역마다 먼저 도착하는 대원들을 배치시켜. 언제 멈출지 모를 일이니까.”
「알겠다.」
대원들에게 각자의 자리를 지킬 것을 지시내린 뒤에는 모두가 어서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야마토의 제지로 아주 약간의 침착함을 되찾은 미미는 여전히 다리를 떠는 중이었다. 옆에 앉아있던 다른 대원이 그만 하라고 타박을 해보아도 이것만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갑부면서 왜 직원들 월급을 안 줘?!”
“자기 배만 부른 돼지새끼들이 어디 한 둘이겠어.”
심지어 그런 놈들은 타우로시즈나 리브러즈의 눈도 피해가기 일쑤지. 씁쓸한 현실을 곱씹어보던 야마토는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쌕쌕 소리를 내며 뒤로 멀어져가는 바깥의 건물들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눈을 떼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못 하고 울던 히카리의 모습이 함께 지나가버리는 것 같았다. 미미는 여전히 다리를 떨어댔고 야마토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해서 도착한 곳에는 뜻밖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야마토는 어째서 자신의 동생이 집무실이 아닌 현장에 나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미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놀란 마음에 얼른 타케루에게 달려가 그를 불렀다.
“타케루? 어떻게 온 거야?”
“아, 미미누나. 저야 날아왔죠.”
“그게 아니고, 왜 왔느냐고.”
“가만있을 수는 없잖아.”
불만어린 야마토의 목소리에도 타케루는 여유롭기만 했다. 아니, 여유롭다는 것은 그가 내보이는 겉모습뿐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야마토는 타케루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많이 불안정한 것을 쉽게 눈치 챘다. 타케루는 히카리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사무실을 빠져나와 이곳으로 출발했다. 덕분에 미미와 야마토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착하고 나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보니 대원들의 뒤로 상황만 전해 듣고 있던 중이었다. 타케루는 한 쪽 손으로 자신의 반대편 팔을 쓸어내렸다. 많이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뭐, 물론 히카리라면 분명 괜찮겠지만.”
“…….”
“걱정 되는 걸 어떡해.”
“그래, 알았다.”
이 이상 동생에게 면박을 주기도 뭐 했다. 그는 히카리의 파트너였고, 오랜 친구였으니 이 정도로 멋대로 구는 것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마토는 타케루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주고는 다른 대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까 말했다시피 열차가 도착할 역마다 대원들을 대기시켰다. 우리는 일단 상황을 지켜볼 거다. 상대는 민간인들이야. 그들이 노리는 건 사사키 한 명이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생각은 없을 거다.”
야마토는 상관의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달리 미미는 서둘러 움직이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 하고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인지는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조금만 인내심을 가진다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몸이 제멋대로였다. 어서 달려가 히카리를 구해오고 싶었다. 그 때였던가. 타이밍이 좋았던 건지, 그저 우연이었는지. 한 대원이 상관을 향해 급히 다가와 현재 열차 안의 상황을 전달했다.
“열차 안은 의외로 조용하다고 합니다. 안에 리브러즈의 변호사분이 있다죠? 그 분이 사람들을 달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의자들을 설득시키는 중인가 봅니다.”
“야가미 양이?”
“예.”
대원의 말을 가감 없이 모두 들은 세 사람은 눈을 크게 뜬 채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이 히카리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열차 안의 상황은 타우로시즈 대원이 해준 말 그대로였다. 히카리는 빠르게 달리고 있는 열차 안에서 홀로 고요히 서있었다. 괴한들이 타깃이 된 사사키를 자신의 뒤로 감춘 히카리는 사람들과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대치중이었다. 대화를 나눠보자던 그녀의 말에 몇몇 사람은 헛웃음을 짓기도 했지만 히카리는 괘념치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 말도 않고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시간이 서서히 흐르니 사람들이 알아서 입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정황을 들을 수 있었다. 사사키는 자신의 하청업체 직원들의 노동력을 한계까지 빨아먹고는 턱없이 적은 대가를 주었던 것이었다. 소문으로 듣기는 했으나 직접적인 피해자들의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더 한 쓰레기였다. 꽤나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의 뒤에 있는 남자를 쏘아봐준 히카리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입술을 뗐다.
“여러분의 말을 들어보니 얼마나 억울하실 지는 잘 알았습니다.”
“하, 당신이 뭘 어떻게 압니까. 한 번도 이런 부당한 대우는 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그래! 지금 저 새끼를 감싸고도는 것만 봐도 답 나오잖아!”
“네, 이런 대우는 받아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억울함이 뭔지는 잘 알아요. 지금 느끼고 계신 답답함이 뭔지도 잘 알죠.”
“괜히 이해하는 척 하지 말아요. 역겨우니까!”
“척이 아닙니다. 이런 짓을 한다 해도 사람들이 여러분의 말을 들어주지는 않아요. 오히려 혼란을 야기 시켰다면서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겁니다.”
히카리의 차분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지금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자신들이 열차를 습격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본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아도 ‘그게 정당하지는 않아.’ 라며 욕을 할 게 뻔했다. 물론 욕을 먹을 것을 알면서도 한 짓이었다. 이들은 그만큼이나 절박했다.
“지금 이순간도 여러분들의 업주……. 그러니까 지금 이 분께서 신경 쓰는 건 여러분이나 다른 사람들의 안위보다 ‘이러다가 열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정도겠죠.”
“이, 이봐!!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번에는 사사키라는 남자가 놀라 소리를 쳤다. 히카리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 괴한들을 막아주고 있자니 그녀가 본인의 편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히카리는 그것을 부정하듯이 쌀쌀한 어투로 대답했다.
“사실 아닌가요.”
“이, 익……!!”
“세상이 이 따위니까요. 이 사람은 매스컴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에 반해 여러분은 힘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셨을 테죠.”
“…….”
“도와줄 사람, 필요하셨잖아요.”
열차 내부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무도 히카리의 말에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 했다. 그녀의 말이 전부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울컥거린 마음을 숨기지 못 하고 얼굴을 찡그리기도 했다. 그래, 이거 하나면 충분했다. 공감해주고,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미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리브러즈에서 일하는 동안 뼈저리게 느껴온 히카리는 어느새 무기를 내려놓은 사람들을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섰다.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믿어만 주신다면 신께 맹세하고서 있는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드릴 테니 이제 멈춰주세요.”
“……당신이 어떻게 우릴 도울 건데요.”
“전 리브러즈의 변호사입니다.”
푸른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 위로 코트를 걸치고 있던 탓에 사람들은 그녀가 리브러즈의 일원이란 사실을 몰랐다. 히카리는 자신의 말을 입증하듯이 코드 깃을 살짝 젖혀 벳지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아실 테지만 여기 타고 계신 다른 승객 분들은 아무런 연관도 없습니다. 부디 멈춰주시길 바랍니다.”
“당신이 정말로 우릴 도와주실 건가요?”
“네. 반드시 힘을 보태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히카리가 이들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지는 미소였다. 히카리의 설득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들고 있던 무기들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히카리는 그에 대해 공손히 감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어느새 다른 칸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기쁨을 표시하고 있었고, 원래 타고 있던 승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키리는 유일하게 홀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사사키를 향해 뒤돌아섰다.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를 한 번 노려봐준 히카리는 이 상황을 타우로시즈에 알리기로 했다.
「응답이 왔습니다! 열차는 다음 정거장에서 안전하게 멈출 것 같습니다. 대기하고 계시던 대원들은 자리 이탈하지 마시고 계속 지키고 있어주십쇼.」
무전을 통해 들려온 소식은 가히 희망적인 것이었다. 야마토와 타케루는 벙찐 얼굴로 굳어져 있었고 미미는 제 자리에서 방방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마 진짜로 히카리가 설득시킨 거야?”
“그런 것 같은데?”
“우리 히카리 진짜 멋있다!!”
“원래 멋진 아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세 사람 모두 히카리의 능력에 감탄함과 동시에 크게 안도했다. 조금 전까지 갑갑하게 죄여오던 가슴이 단번에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타케루는 긴장이 많이 풀렸는지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중이었다. 그를 보고 미미가 짓궂게 놀려주었다. 이제 한 동안 놀림거리가 될 타케루를 미리 애도하며 야마토는 열차가 있던 쪽을 바라보았다. 다음 역에서 멈추어 승객들을 모두 안전하게 피신시키고 나면 잘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괜한 발걸음을 한 셈이었지만 도리어 기뻤다. 아직도 타케루를 골려먹고 있는 미미를 데리고 차로 돌아가려고 하던 그 때였다. 상관의 무전기가 치직거리더니 이내 다급한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대원, 지금 당장 열차 쪽으로 병력지원을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지원 요청이었다. 야마토와 미미, 그리고 타케루는 다시 심각해진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 하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무슨 일이지?”
「벼룩들입니다!」
“뭐야?”
「벼룩들이 대거로 나타났습니다!」
“열차를 먼저 습격했던 민간인들과 관련이 있는 건가?”
「그건 아직 모릅니다! 일단 서둘러주십쇼!」
야마토를 비롯하여 근처에 있던 모든 대원들은 긴장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미미는 어느 순간 자신의 총을 꽉 그러쥐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전투는 언제나 두통을 불러왔다. 야마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세게 털어냈다. 상관은 대원들을 향해 전부 열차가 도착할 역 쪽으로 이동하길 명령했고, 대원들은 일제히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뒤따르려던 야마토는 자신의 옆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오려는 타케루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타케루, 너 설마 따라올 생각은 아니지?”
“그럼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거야?”
“당연하지! 상대는 벼룩들이라고!”
“하지만!”
타케루는 분한 마음에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했다. 싸움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야마토나 미미와는 달리 자신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알면서도 고집을 피우고 싶었다. 히카리가 너무 걱정이었다. 하지만 평소 형제들의 싸움에는 끼어든 적이 없던 미미마저도 오늘만큼은 야마토의 편에 서서 타케루를 말리는 데 가담했다.
“야마토 오빠 말 들어. 얼른 다녀올게. 히카리도 분명 안전할 거야.”
“그렇지만 저도 가고 싶어요!”
“위험하단 말이야.”
“위험한 건 다들 매한가지잖아요!”
“그렇다 해도 우리랑 너랑은 다르지! 부탁이니까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줘.”
야마토와 미미는 울상을 짓는 타케루를 억지로 떼어놓고 동료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속상해하는 동생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야마토는 반드시 히카리를 무사히 구해오겠다 다짐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이 타 대원들을 따라 이동하던 중간, 이미 진을 치고 있던 벼룩들이 그들의 앞을 막으려 덤벼들었다. 야마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발도했고 미미도 품에 지니고 다니던 총을 꺼내들었다. 다가오는 벼룩들을 향해 공격하려던 순간, 야마토는 미미의 앞을 막아 선 채 말했다.
“미미, 먼저 가.”
“뭐? 어떻게 그래!”
“넌 저격수잖아. 얼른 가서 자리 잡아. 지원사격 없이 힘드니까.”
미미는 주변을 이러저리 둘러보았다. 벼룩들과 맞붙고 있는 타우로시즈 대원들, 온갖 무기들이 내는 난잡한 소리, 그리고 비명소리. 일대는 혼잡함으로 이미 난리인 상태였다. 다른 저격수들이 열심히 타우로시즈를 지원 중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벼룩들이 얼마나 날래고 악랄한 녀석들인지는 이제 모르지 않았다. 미미는 결심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읏, 알겠어! 대신 다치면 각오해! 오빠 어깨 아직 정상 아니거든!!”
미미의 협박에 야마토는 미소로 화답했다. 야마토의 어깨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죠도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고 완전히 치료가 될 때까지 무리하면 안 된다는 말을 늘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리를 하지 않으면 어깨는 고사하고 목이 달아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마토는 검의 손잡이를 제대로 힘을 주어 그러쥐었다.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벼룩들을 빨리 물려내고 히카리를 구조해야 했다. 야마토는 일단 자신의 바로 앞에 보이는 벼룩에게 달려들었다. 어떤 타입의 무기를 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여유롭게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나 있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야마토가 다가가는 낌새가 느껴지자 그 벼룩은 몸을 살짝 틀어 검 날을 재빠르게 피해냈다.
“우와, 뭐야. 놀랐네.”
벼룩의 목소리가 꽤나 낮았다. 벼룩이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어질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런 목소리를 가지고, 심지어 전혀 놀란 것 같지 않은 말투로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니 야마토의 짜증이 더욱 치밀어 올랐다. 야마토는 곧바로 다음 공격을 먹일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그럼에도 사내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야마토는 직감적으로 이 벼룩이 다른 녀석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번인가 더 검을 휘둘렀다. 벼룩은 그 때마다 가볍게 몸을 놀려 야마토의 공격을 피했지만 그 뿐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그는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 사실에 더욱 약이 오른 야마토는 이를 악 문 채로 물었다.
“열차에 탄 놈들은 너희와 한 패인가?”
“응? 누구?”
“사사키의 하청업체 직원들 말이다.”
사내는 야마토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곧 재미있다는 듯이 손뼉을 한 번 치고는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웃긴 건지 야마토로써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표정으로 보여주자 사내가 손을 내저였다.
“아아, 어쩐지 너무 소란스럽다 했지. 타우로시즈가 미리 와있기에 왜 그러나 했는데.”
“같은 편은 아니란 소리군.”
“응, 전혀 아니야. 그 사사키라는 놈은 운이 없는 편인가 봐?”
그리 말하는 사내의 후드 아래로 새까만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오늘 이 열차를 노리는 이가 또 있었거든.”
“그렇다면 너희는 역시 의뢰를 받고 온 거군. 누구에게서? 누가 너희를 사주했지?”
“그거야 노코멘트지. 고객의 익명성을 지켜주는 건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야, 대원님.”
사내가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세워 붙였다. 한 없이 나긋한 그의 반응은 야마토의 열을 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찌 됐건 벼룩들이 노리는 것은 정말로 이 열차였다. 무슨 짓을 벌일지는 아직 모를 일이었지만 야마토는 점점 더 불안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검은 개나 벼룩들이 얼마나 미치광이들인지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몸소 익힌 탓이었다.
“저기 타고 있는 승객들은 너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이야!”
“흐응, 그래서?”
“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너무도 무심한 목소리에 야마토를 기어코 분노 터뜨렸다.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신경쓰다보면 할 수 있는 일도 못 해. 그러니 일단 일을 받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신속히 처리하는 편이 가장 좋지. 너무 고민이 많으면 본인에게 해롭거든. 아, 그러고 보니 벼룩들 중에도 그런 놈이 하나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 그리 복잡한지. 그 녀석 때문에 요즘 우리 보스 신경이 꽤 날카로워. 너희들이 건드려버리는 바람에 말이야. 꽤 아끼던 녀석이거든.”
“……뭐, 무슨.”
“왜 모른 척을 하고 그래? 있잖아,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는 녀석.”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야마토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까지 하얗게 질려있었다. 벼룩은 그런 야마토의 사소한 반응 하나하나까지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즐겁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후드로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은 호를 그리는 입술만 보였다. 보이는 부분은 겨우 입과 코끝 정도였지만 이 남자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생겼는지는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역시, 이 벼룩은 뭔가가 이상했다. 다른 벼룩들과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어둡고, 무겁고, 사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맨얼굴을 직접 봤을 테니 그간 설쳐대던 소문이 얼마나 웃겼는지도 알겠네. 기사도 열심히 나도는 중이고 말이지.”
“시끄러워.”
“흉할 거라는 소문이 돌 때 꽤나 웃었지. 솔직히 좀 먹히는 얼굴이잖아. 귀엽기도 하고.”
“시끄러워…….”
“그래도 다행이야. 그 정도로 끝나서 돌아온 걸 보면. 너희들에게 당했던 고문은 수위가 센 편에 속하긴 하지만 평소에 당해오던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말이야. 잘 버티고 나온 건 그 덕분일 수도 있겠네.”
그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순식간에 야마토의 검이 벼룩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파고들 뻔 했다고 표현해야했다. 벼룩은 작은 단도로 야마토의 검을 완벽히 막아했다. 날붙이끼리 부딪혀 나는 카각- 소리가 소름끼쳤다. 야마토는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벼룩을 쏘아보았다. 이 이상 입을 연다면 그 잘난 혀라도 베어내줄 생각이었다.
“왜 그렇게 발끈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기껏 다 잡은 벼룩을 놓쳐서야? 그것도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시끄럽다고 하잖아!!”
“물론 정의로운 타우로시즈 대원님께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일지도 모르지. 같은 조직의 사람을 어떻게 하면 그리 막 대할 수가 있느냐. 이런 말이나 하면서 호들갑을 떨 수도 있겠지만. 너무 그렇게 정색하지 마.”
벼룩은 금방이라도 밀려들어올 것 같은 야마토의 검을 세게 밀쳐냈다. 뒤로 살짝 밀려나는 것 같던 야마토는 곧바로 무게중심을 앞으로 쏠리게 한 다음 틈을 주지 않고 덤벼들었다. 생각보다 야마토의 공격이 빨랐는지 이번엔 벼룩이 야마토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하지만 완벽히 피해내지는 못 하고 손등에 작은 자상을 남겨야 했다. 차갑게 베어지는 느낌이 들자마자 뒤이어 고통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혀를 한 번 차더니 다친 손을 탈탈 털었다.
“너무 그렇게 열 내지도 마.”
상처 위로 고이기 시작하는 피를 할짝이던 남자가 야마토를 향해 한 번 더 미소 지었다.
“아이의 목에서 비명 소리만 나던 건 아니었어.”
야마토의 표정은 보란 듯이 굳어지고 말았다. 남자가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고 싶지 않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입 다물어. 네 입 안을 다 도려내버리기 전에……!!”
“아하하, 이것도 그냥 소문이야. 그나저나 난 상처 나면 안 되는데.”
새까만 옷에 피를 슥 문대버린 남자는 여전히 소란스러운 싸움판을 힐끗 돌아보았다가 이내 다시 야마토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순간 야마토는 후드 아래에 가려져있던 사내의 눈동자를 아주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다. 아주 살짝 스쳐본 것일 뿐이었는데도 남자의 눈동자는 푸른빛으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그가 내뿜는 살기가 야마토를 조용히 짓눌렀다. 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잊으라고 해도 잊을 수 없는 눈동자였다.
“너…….”
“아, 이걸 어쩐다. 잡담이 너무 길었군.”
“네놈!!”
“그럼 반가웠어.”
그가 인사를 건넨 동시에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열심히 싸우고 있던 타우로시즈의 전 대원들은 토끼눈이 되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차가 도착했을 역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벼룩들은 싸우는 것을 멈추고 전부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야마토와 이야기를 나누던 벼룩 역시 재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바보같이,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벼룩들은 타우로시즈를 역 쪽으로 가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 시간을 벌고 있던 것이었다. 야마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역을 감싸 오른 화마를 바라보았다.
“히카리!!”
이미 터질 것 같이 복잡해진 머리는 더 이상의 사고를 하지 못 했다. 대뜸 역으로 달려가려는 야마토를 다른 대원들이 말려주지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불길 속으로 뛰어 들 기세였다. 뒤늦게 다시 돌아온 미미 역시 야마토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허탈함에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열차는 갑작스러운 폭발의 충격으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 누가 이런 호화로운 열차 안에 폭탄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을 줄 알았을까. 기관사가 있는 맨 앞 칸부터 휘감고 타들어오는 화마가 사람들의 숨통을 뜨겁게 녹였다. 그나마 뒤쪽 칸에 있던 히카리는 심하게 흔들거리던 기체 안에서 심하게 나뒹굴어야했다. 덕분에 신체의 이곳저곳을 세게 부딪쳤지만 그 가운데서도 머리를 제대로 부딪친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의식은 붙잡고 있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그러져 버린 의자사이에 다리까지 끼어버리고 말았다. 다리에 압박이 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도저히 빼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이 너무 어지러웠다. 그 사이 열차는 불길에 점점 더 크게 휩싸여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타우로시즈의 대원들 역시 폭발한 열차 덕에 고스란히 피해를 봐야했다. 크게 부상을 입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열차 안의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정신을 다잡고는 불을 끄기 위해 급파된 소방대원들과 함께 열차 주변의 불부터 끄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길은 쉽게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이러다 2차적인 피해가 생길 수도 있었다.
“얼른 사람들을 끌어 내!! 한 명이라도 살려!!”
걸레짝이 되어버린 열차는 폭발 때문에 옆으로 뒤집히고 만 채였다. 열차로 들어서기 위한 출입문이 위쪽을 향해있었다. 대원들은 문짝을 뜯어내다시피 들어낸 뒤 뜨겁게 달구어진 열차의 안으로 들어섰다. 폭발은 앞쪽 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앞 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 미친 새끼들……!!”
절로 욕지거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소방대원들은 아무런 장비도 없이 열차 안으로 들어서려는 타우로시즈 대원들을 막아섰다. 열기가 높은데다 언제 또 2차 폭발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연기도 너무 심했다.
“저희 소방대원들이 더 오고 있으니 구조작업은 저희에게 맡기십쇼.”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가 없어요. 저기, 미안하지만 마스크라만이도 빌려주십시오.”
“안 됩니다. 당신들도 위험해요.”
들어가게 해 달라, 절 대 안 된다. 두 대원이 실랑이를 벌일 동안 다른 소방대원들은 이미 열차 안으로 들어가 구조작업을 실행 중이었다. 뒤쪽으로 이동할수록 숨이 붙어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소방대원들이 열심히 본인들의 할 일을 하는 동안 타우로시즈는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답답해하던 이들은 소방대원들이 사람들을 하나, 둘 씩 밖으로 들어 올릴 때 아래에서 그들을 받쳐주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구조작업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 쯤, 저 끝에서 소방대원 하나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여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다리가 끼인 사람이 있어요! 숨은 붙어있습니다!”
“타우로시즈 대원님들, 이 분 복장을 보아하니 리브러즈 쪽 사람 같습니다.”
“아까 보고받았던 야가미 양이군.”
그녀는 열차 내의 분란을 한 순간에 막아 주었던 영웅이었다. 부상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은 정말로 다행이었다. 소방대원들은 바로 히카리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지렛대를 이용해 히카리의 다리를 옥죄고 있던 의자를 들어냈다. 심하게 끼어 있었는지 히카리의 다리는 상처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다리보다도 머리 쪽이 걱정이었다. 제법 세게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대원들은 축 늘어진 히카리의 몸을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타우로시즈 대원들은 히카리의 다리를 무사히 빼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뻐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그 쪽으로 벼룩들이 향하고 있다. 조심해!!」
갑작스러운 무전은 절망스러운 소식만을 전해왔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뭐? 지금 이 상황에 벼룩이라니, 몇 명이나?”
「꽤 많아, 그 쪽으로 향하고 있어.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사람들을 신속히 구조 바란다!!」
“그런 말 안 해도 우린 이미 서두르는 중이…….”
“이런 젠장!”
누군가의 입에서 짤막한 욕지거리가 나왔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다른 이들의 이목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무언가 서늘한 기분이 드는 곳을 바라보니 열차의 입구 위로 선 새까만 인영이 하나 보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그 아래로 가면이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다. 익히 들어 이제는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코드명은 A-1. 타우로시즈에게 붙잡히고도 다른 벼룩들의 도움에 의해 도망쳐나갔던 소년이었다. 대원들 모두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전부 부상을 당해버린 탓에 싸움이 가능한 타우로시즈 대원은 네 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소방대원이었기 때문에 벼룩이 달려든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안 돼, 막아야 한다. 일단 야가미 양이라도 데리고 나가야해.”
대원 중 한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A-1, 아니 야가미 타이치는 타우로시즈 대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내려 쓰러져 있는 히카리를 눈에 담았다. 그녀의 다리에는 시뻘건 피멍이 들어있고, 머리에서는 붉은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면 속, 타이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열차 안은 매캐한 연기와 솟구치는 열기 때문에 견디고 있기가 힘겨워 보였다. 이대로 가면 의식을 잃은 히카리가 더욱 위험했다.
“……큭! 어떻게든 막아!”
“소방대원들은 어서 야가미양을!”
타우로시즈의 말에 따라 소방대원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것에 히카리의 몸을 실으려 했을 때, 익숙한 총성이 들렸다. 소방대원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타이치의 하얀 가면을 쳐다보아야했다. 아래에 있던 타우로시즈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놈들이 오고 있어. 이대로 가면 위험해’
벼룩들이 열차로 향하는 이유는 사사키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리브러즈의 제복을 입고 있는 히카리를 본다면 무슨 행동을 할지, 그것은 불 보듯 뻔했다. 타이치는 볼 안쪽을 세게 씹었다. 차라리 저 대원들이 서둘러 히카리를 데리고 달아나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벼룩들이 다친 타우로시즈보다 느릴 리는 없었다.
‘히카리.’
여동생을 바로 앞에 두고서도 이름 한 번을 제대로 불러 볼 수 없었다. 뜨거운 열기에 가면 안쪽으로 땀이 축축하게 차올랐다. 그럼에도 어째서 입술은 바짝 마르는지. 타이치는 여즉 욱신거리는 몸을 가지고도 가볍게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행동 개시에 놀란 대원들이 타이치를 막으려 무기를 든 채 열차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의 무기가 타이치의 몸에 닿기보다 대원들의 몸뚱이가 저만치 멀리 나가떨어지는 것이 먼저였다. 복부, 혹은 옆구리를 순식간에 가격당한 대원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야했다. 타이치는 분명 극심한 고문을 당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몸이었다. 후유증 같은 것도 없는 건가, 저 괴물은. 그리 생각하며 대원들은 아픔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아주 짧은 찰나였다. 하지만 벼룩이 히카리를 안아드는 데에는 충분한 모양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소방대원이 타이치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대체 야가미양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
“그 애는 지금 다쳤다고!!”
절박한 목소리에 타이치가 고개를 돌려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알아.”
“무…….”
“그것도 너무 심하게 다쳤지.”
지금 이 남자의 목소리가 떨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미친 것일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타이치는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히카리의 몸이 최대한 흔들리지 않도록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대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잡힌 다리를 빼낸 후, 뒤집힌 열차의 밖으로 뛰어나왔다.
“안 돼, 잡아!!”
“벼룩 한 마리가 야가미양을 데려갔어!! 지원 부탁 바란다!!”
타이치는 대원의 다급한 무전을 뒤로 하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타이치의 품 안에서 잠들어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도가 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곳에 갇혀있었는데, 어째서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신선한 공기를 만끽하기로 했다. 편해진 호흡을 몇 번인가 더 반복하던 히카리는 이내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기분이었다. 처음엔 타케루인가 싶었지만 그는 확실히 아니었다. 제대로 확인을 해보고 싶었지만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히카리는 답답함에 미간을 찡그렸다.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 때였던가. 목소리가 들렸다. 동굴 안에 갇힌 것처럼 울려대던 주변의 소음 사이로 섞여든 목소리 하나가 참으로 다정했다 말한다면,
“정신 좀 차려봐.”
“…….”
“기껏 살아있다는 걸 알았는데, 또 슬프게 만들지 마.”
그것은 대체 누구의 목소리인가.
히카리는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이 입술을 열었다.
“머리를 꽤 심하게 부딪쳤나 봐요. 아파요, 어지럽고.”
“…….”
“너무 아파요.”
여전히 눈은 뜨지 못 한 채, 히카리는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그러자 다리와 등을 받쳐 들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히카리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냈다. 왜 이렇게 슬프지, 왜 이렇게 아플까. 누군가의 앞에서 우는 것은 언제나 어색한 일이었다. 운다 해도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다. 분명 이제까지는 그래왔었음에도 히카리는 어쩐 일인지 아프다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래, 사실은 알고 있었다.
“오빠, 나 아파.”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오빠- 라는 소리를 제 동생에게서 들어본지가 너무 오래 된 탓이었던가. 다리를 움직일 수가 없어 멈추었다. 아프다는 말에 속이 미어져 멈추었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쿵쾅거렸다. 그 부끄러운 심장소리를 히카리가 전부 듣고 있었다. 예쁜 얼굴은 이미 엉망이었다. 타이치는 주위를 한 번 확인한 뒤,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걸아가 히카리를 내려주었다. 머리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눕혀준 타이치는 한동안 히카리의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졌다.
“곧 타우로시즈 대원들이 올 거야. 조금만 참아.”
차분히 동생을 달래던 타이치는 결국 참지 못 하고 히카리와 이마를 맞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히카리는 계속 뜨지 못 하고 있던 눈을 천천히 열 수 있었다. 흐릿한 시야 때문에 갑갑한 나머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야했다. 그러다 겨우 초점을 맞추었지만 나름 선명해진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거라고는 새하얀 가면뿐이었다. 이것만 벗겨내면 제 오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히카리는 손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그런 히카리의 마음을 어떻게 읽었는지 타이치가 대신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말없이 건네는 손길이 따스했다. 이 온기를 얼마나 오래도록 바랐는지 그가 알기나 할까.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빠, 가지 마.”
“…….”
“가지 마.”
애절하게 부탁을 해보았지만 히카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타이치는 가지 말라는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매정한 현실이 서글퍼 하염없이 울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돌아와 주면 좋을 텐데.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히카리는 어떻게든 그를 붙잡고 싶었다. 무슨 사정이 있어 자신들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 하는지는 뒤에 생각할 일이었다. 타이치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는 히카리의 눈물을 계속 닦아내주었다.
“미안.”
“싫어, 사과하지 마. 미안하다는 소리는 됐으니까 여기 있으란 말이야!”
“미안해.”
타이치의 목소리는 히카리의 기억 속, 아이였을 때의 목소리보다 훨씬 낮아져있었다. 하지만 울지 말라며 자신을 달래주는 말투는 그대로였다. 숨이 막힐 것처럼 몰려오는 그리움에 히카리는 더욱 크게 울어야 했다. 눈물에 가려 눈앞의 가면이 일렁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타이치가 다시 사라질 것 같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어떻게든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내가 아니라고 말해줄게. 오빠가 그랬던 게 아니라고 다 밝혀줄 테니까 가지 마. 왜 자꾸 날 떠나는 건데! 제발, 여기 있어!”
머리를 다친 마당에 소리를 질러봐야 좋을 게 없었다. 타이치는 거의 본능적으로 히카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싫다는 듯, 히카리가 정말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에도 오빠에게 떼를 써본 적이 없는, 아주 순한 동생이었다. 그런 아이가 지금은 타이치에게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오빠 미워.”
“…….”
“왜 자꾸, 내가, 가지 말라는데도! 윽, 진짜 미…….”
“히카리.”
히카리, 자신의 이름 세 글자.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낯설고 그리운 말이었다. 히카리는 순간 우는 것도 멈춘 채 마주잡은 타이치의 손만 꽉 쥐어야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말없이 가만히 있어야했다.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 출혈로 인해 이미 불규칙적이던 히카리의 호흡이 방금 운 것으로 인해 더욱 불안정했다. 타이치는 그 옛날처럼 동생을 달래주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히카리는 기억하고 있던 것과 똑같은 손길을 받으며 서러운 눈물을 삼켜내야 했다. 상냥하고 다정한 손길이 오히려 지독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한 낮의 꿈같이 왔다가 다시 바람처럼 가버리겠지. 히카리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러지 말라고, 이러면 또 상처가 난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마저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미웠다. 그가 미웠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던 까닭은.
“히카리, 나 너무 미워하지 마.”
너무도 사랑스러운 자신의 오빠였으므로.
“내가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안에 얼마나 커다란 진심이 담겨있는지는 캐묻지 않아도 당연히 알 수 있었다. 히카리는 타박하듯이 타이치의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그럼 얼굴이라도 보여주고 가.”
“…….”
“그리움만이라도 선명하게 남기고 가. 부탁이야. 대체 언제까지 9살 소년으로만 살 셈인데. 언제까지 그렇게 남겨둘 거야.”
히카리의 말에 타이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에게 있어 나는 거기에서 영원히 멎어있었구나. 그래, 그렇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타이치는 하염없이 흐르는 히카리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망설임 없이 가면을 벗어냈다. 답답한 가면을 멀찍이 떨어뜨려두고 어둡게 그늘을 드리웠던 후드마저도 뒤로 넘겨버렸다. 히카리는 그제야 눈물로 자욱한 갈빛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릴 때의 얼굴이 많이 남아있었다. 화질 나쁜 cctv 영상으로만 겨우 보았던 얼굴을 눈 앞에서 바로 마주하자 감회가 남달랐다. 히카리는 여전히 눈물을 흘려냈지만 그래도 한 줌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녀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렸다. 뻗은 손은 타이치의 뺨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우리 오빠 잘 생겼네.”
“너도 예쁘다.”
“왜 다정한 것도 전부 그대로지?”
이래서 더 아픈 건가봐. 그리 말하며 히카리가 다시 눈을 감았다. 간신히 잡았던 의식이 다시 날아갈 것 같았다. 시야가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덕분에 멀미가 날 것만 같았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이었다. 다친 다리도 점점 더 심하게 부어오르는 중이었다. 타이치는 얼른 타우로시즈 대원들이 달려오기만을 바라며 히카리의 손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지켜주지도 못 하고. 미안해. 못나서, 아프게 해서.”
“오빠…….”
“나도 널 두고 가고 싶지 않아. 진심이야.”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분명히 히카리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결국 다시 정신을 잃고서도 히카리는 끝내 타이치의 손을 놓지 않았다.
타케루는 열차 내에 폭발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역으로 달려갔다. 야마토와 미미가 한 당부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전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사람들 중 반은 죽어나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만 넘어져버릴 뻔 했다. 간신이 몸을 추스른 타케루는 타우로시즈 대원들이 빙 둘러싸고 있던 곳을 몰래 지나쳤다. 그리고 역으로 갈 수 있는 다른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업무상 인근 지역에 자주 오곤 했던 타케루는 역으로 이어지는 길목 중, 인적이 잘 닿지 않은 길목이 따로 있다는 걸을 알고 있었다. 그 쪽엔 낡은 계단이 하나 나 있었다. 역의 위층으로 갈 수 있는 계단이었다. 타케루는 망설임 없이 위쪽으로 향했다. 계단을 오를수록 소방대원들과 남은 타우로시즈 대원들이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러다 대원 하나가 크게 외친 목소리를 들었다.
“벼룩 한 마리가 야가미양을 데려갔어!! 지원 부탁 바란다!!”
그 순간 몸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것만 같았다. 철제로 된 계단에서 크게 발을 구른 탓이 쾅- 하는 소리가 났지만 안쪽의 상황이 혼잡하다 보니 아무도 듣지 못 한 것 같았다. 타케루는 녹슨 계단의 난간을 세게 붙잡았다. 시뻘건 녹이 타케루의 손에 잔뜩 달라붙었다. 그는 입술을 한 번 꽉 깨물었다. 차라리 나도 형처럼 총이나 검을 배울걸 그랬어.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위로 완전히 올라가보니 열차가 보기 좋게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구조작업을 계속 진행하고 있던 소방대원들 중 몇몇이 타케루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를 불러 세웠다. 하지만 타케루는 계속 해서 걸었다. 뒤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도 무시한 채 무작정 다리를 움직였다.
‘히카리, 어디 있어.’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렇게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혀 본 것은 10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타케루는 자꾸만 비틀거리는 몸을 주체하지도 못 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있어.’
울렁거리는 시야로도 그는 히카리의 모습만을 찾았다. 아무 곳에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 곳에도. 대신 타케루는 전혀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새까만 아지랑이가 보였다. 타케루는 자신의 눈앞이 아예 시커멓게 물들었다고 착각하고 말았다.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 순간 타케루는 결국 풀려버리고 만 다리를 어찌하고 못 한 채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부딪친 무릎이 아팠다. 손바닥도 땅에 쓸려 까진 것 같았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좋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상처 난 자리가 아팠다. 그런데 우습게도 타케루는 아프다는 말 대신 히카리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 사람 마냥, 타케루는 히카리의 이름만 반복적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다섯 번째로 부르려던 찰나였다.
“히카리는 무사해.”
타케루는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까만 아지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람의 인영이었다. 조금 더 시선을 올려보았다.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무사하니까, 걱정 마.”
“…….”
“많이 컸네, 타케루.”
타케루는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타케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제야 타케루는 대답을 해줄 수 있었다.
“예, 많이 컸죠. 10년이나 지났는걸요.”
“그렇지.”
“형도 많이 컸는데요.”
타케루의 말에 그가 살풋 웃음 지었다. 야가미 타이치. 그리 웃는 모습에서 어릴 적의 모습 그대로 보였다. 타이치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타케루를 마주봐주다가 곧 그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똑바로 선 타케루는 정말로 많이 자라있었다. 입고 있던 푸른 제복은 타케루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멋들어지게 맞았다. 자신의 가슴까지 밖에 오지 않던 아이는 훌쩍 자라 거의 마주볼 수 있을 정도였다. 목소리는 야마토만큼이나 낮아져있었고 원래도 반짝이던 금발은 더욱 부드럽게 빛을 발했다. 아주 듬직하게 커버린 동생을 바라보며 타이치는 있는 그대로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진짜 멋쟁이가 다 됐구나.”
“우리 형은 그런 칭찬 안 해주던데.”
“그래?”
마치 오랜 친구를 간만에 만난 것처럼, 둘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타케루는 타이치의 뒤로 멀찍이 떨어진 곳에 히카리가 누워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절로 입가를 굳혔다. 타이치는 다른 벼룩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히카리를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야했다고 설명했다. 히카리가 리브러즈 사람이란 것을 알면 숨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용납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도 덧붙여주었다.
“이제 2-3분 내로 타우로시즈 대원들이 몰려올 거야.”
2분에서 3분. 타이치는 그 사이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히카리를 타케루에게 맡기고 곧장 떠나려는 타이치의 팔을 타케루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의 시간을 많이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히카리, 그 동안 힘 많이 냈어요.”
“…….”
“형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을 때에도 히카리는 멈춘 적이 없어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날의 사건을 들춰내려 힘냈어요. 많이 지칠 만도 한데 리브러즈의 일도 늘 성실하게 해냈죠. 여기 일은 힘들었지만 지내는 건 나름 괜찮게 지냈어요.”
속사포마냥 빠르게 뱉어낸 말들은 두서도 없고 마구잡이식이었지만 타이치는 한 개도 빼놓지 않고 들어주었다. 타케루는 타이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면 뒤에 숨기고 있던 눈빛이 저리 부드럽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 중 몇이나 알려나. 순간 울컥해지는 마음에 타이치의 팔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힘이 들 것도 없었고, 먹기도 잘 먹고, 가끔씩 악몽을 꾸는 것 빼고는 잠자리도 편했어요. 저희는 그 이후로도 나름 평범하게 지낸 것 같아요.”
“그래, 다행이네.”
“우린 그랬는데.”
타케루가 숨을 한 번 짧게 들이쉬었다. 그의 모습에 타이치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우린……. 그렇게 살았는데. 10년을.”
그 다음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들의 10년은 어땠느냐고, 차마 그렇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고마워, 타케루.”
“아뇨! 제가 더 고마워요. 살아있어 줘서.”
“타케루.”
“우리 형도 정말 많이 보고 싶어 했어요.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언제나 타이치 형을 그렸어요, 그러니까!”
타케루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그 때,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타우로시즈 대원들이 다가오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치는 다소 격양되어 있는 타케루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아이의 등을 세게 끌어안아 주었다. 타케루는 자신에게 닿아오는 이의 체온을 피하지 않았다. 타이치의 손이 등을 다독여주자 참고 또 참았던 말이 튀어나와버리고 말았다.
“이제 돌아와 주면 안 돼?”
타케루는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며 진심을 이야기했다. 다만 어깨가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먹먹했다. 타이치는 그런 타케루의 등을 계속, 아주 천천히 토닥여주었다. 듬직해진 등과 어깨는 꽤나 넓었다. 이만큼 자랐으면 울지 말아야지. 그리 말을 하자 타케루의 떨림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용케 눈물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꼬맹이였을 때에는 울기도 잘 울던 아이였는데, 이제는 눈물을 참을 줄도 아는 소년으로 자라있었다. 이 모든 것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볼 수 있었다.
“다들 형이 돌아오기를 바랄 거예요.”
“타케루, 나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움에 미쳐있던 히키리나 자신의 형인 야마토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뒤이어 미미와 죠, 그러다 끝에는 자신의 모습까지 그린 후에야 타케루는 타이치를 마주 안았다. 그리움에 절어있던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없어.”
“……타이치 형.”
타이치는 서서히 타케루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들어보였다. 타케루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가면으로 얼굴을 덮어씌웠다. 이제 정말로 떠나야했다. 완전히 발걸음을 떼어내기 전, 타이치는 타케루의 파란 눈을 한 번 더 마주했다. 이시다 형제의 눈은 그 옛날에도 지금도 참 예쁘게 빛이 났다. 어떤 남자의 시리기만 한 푸름과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놓치면 다시 보고 싶어질 만큼 좋아하곤 했다. 타이치는 타케루에게 나직히 말했다.
“타케루, 히카리 좀 잘 부탁해.”
그의 말에 타케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원망하면서도 순응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을 한탄했다. 타케루는 뒤돌아서는 타이치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미련이 남아 그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그러자 돌아본 가면이 웃었다. 새하얗게, 또 새까맣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전혀 다른 장소에 와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히카리는 인위적인 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살짝 움직이지 머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무심코 신음을 내자 익숙한 목소리들이 히카리의 이름을 외쳤다. 야마토와 미미, 그리고 타케루의 목소리였다. 미미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섞여있었다. 많이 운 것 같아 보였다.
“타케루.”
“응, 히카리.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괜찮아.”
타케루는 이제 막 깨어난 히카리가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잘 달래주었다. 히카리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새하얀 응급실의 풍경이 보였다. 의사들과 간호사, 걱정 어린 야마토와 미미의 얼굴, 그리고 타케루의 얼굴까지 모두 확인한 히카리는 곧 몸을 일으켰다. 심하게 움직이면 무리가 온다는 미미의 말을 듣고도 히카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히카리, 아직 일어나면 안 돼.”
“이거 놔, 나는…….”
타케루가 히카리를 다시 눕히려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다친 아이와 몸싸움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차분히 타일러 그녀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무리하게 몸을 일으킨 히카리는 극심한 어지러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다친 머리를 만지려하자 야마토가 그녀의 손을 잡아 막아주었다. 약에 취한 것처럼 히카리는 잠시 동안 헛소리를 뱉어내더니 이내 타케루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우리 오빠 좀 찾아줘.”
타케루는 자신의 팔을 붙든 채 매달리는 히카리의 목소리에도 담담하게 반응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히카리는 끊임없이 오빠를 찾아달라는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미미와 야마토는 영문도 모른 채, 두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히카리가 갑자기 제 오빠를 찾는 이유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케루는 독하게 마음먹기로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너 많이 다쳤어.”
“아직 근처에 있을 지도 몰라.”
“가벼운 뇌진탕증세에 출혈도 심해서 안정이 필수래.”
“말 돌리지 마!!”
기어코 히카리가 소리를 질렀다. 근처에 있던 의사들이나 다른 환자들이 일제히 타케루와 히카리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야마토와 미미도 매우 놀란 눈치였다. 히카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누구에게든 처음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도 무시하고서, 히카리는 타케루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소란이 커지자 히카리를 담당했던 의사와 간호사까지 달려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어!!”
“히카리…….”
“옆에 있었단 말이야!!”
“진정해, 너 지금 다쳤다니까.”
“우리 오빠 좀……!! 타케루, 우리 오빠 좀 찾아줘.”
“히카리, 제발.”
타케루는 몸부림치는 히카리를 세게 껴안아야했다. 이렇게 감정이 격해진 상태의 히카리는 본 적이 없었다. 언제고 본인의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했던 그녀가 이렇게 격렬히 화를 내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결국 모든 것이 타이치로 인한 것이었다. 타케루는 히카리만큼이나 크게 소리쳐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까지 히카리가 왜 그리 꾸역꾸역 참아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지금 울어버리면, 억울하다고 소리를 쳐버리면 주위사람까지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너나, 타이치 형이나. 진짜 바보 같아. 그런 면은 빼다 박았어.”
“흐윽, 타케루……. 도와, 윽, 나 좀 도와줘.”
의사들의 손길도 거부한 채, 히카리는 타케루의 품에 안겨 울었다. 가슴이 한계치에 다다를 정도로 쌓이고 있던 설움이 결국 상처를 뚫고 흘러넘쳤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울어버리는 게 나을 지도 모르지. 히카리의 귓가에 그리 속삭여주었다. 그녀는 한동안 눈물을 거두어내지 못 했다. 지쳐서 다시 잠이 들 때까지도 섧게 울었다. 그리고 그런 히카리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야마토가 있었다. 타케루는 바로 쓰러져도 좋을 만큼 피곤했다. 그러니 조금만 휴식을 취한 뒤에 말을 해주기로 했다. 야가미 타이치를 만났었노라고.
세리오스가 반에 반까지 왔네요.
얼른 끝내버리고 싶습니다ㅋㅋㅋㅋㅋ